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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by 매일 성장농부 2025. 4. 18.
제주도 인구는 해방 전해인 1944년 21만9천여 명에서 1946년 27만 6천여 명으로 2년 새 5만 6천 명 이상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은 전국적인 대흉년과 맞물려 사회경제적으로 제주 사회를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1946년 제주도의 보리 수확량은 해방 이전인 1943년과 1944년에 견줘 각각 41%, 31%에 그쳤다.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과 높은 실업률,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진 것이다. 게다가 기근이 심했던 1946년 여름 제주도를 휩쓴 콜레라는 2개월여 동안 최소 369명의 사망자를 내었다.[7] 남로당의 제주도 활동 (1947) 미군 제6사단 브라운 대령이 1948년 5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제주도민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공산진영의 남로당은 1946년부터 제주도에서 공작을 시작하였다. 남로당은 5.10 총선거 실시가 확실해지자 활동을 강화하고 특수 공작원을 본토에서 제주도로 파견하였다. 남로당을 조직하기 위해 본토에서 보낸 훈련받은 선동가 및 조직가는 6명에 불과했으나, 곧바로 500~700 명의 동조자가 합류하였다. 제주 4.3 사건 발생 당시 제주인 60,000~70,000명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당시 전쟁과 전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반미사상에 동조했었다.[8] 제주 3.1절 발포사건 (1947) 1947년 제주북공립국민학교에 열린 3.1절 기념식을 마친 30,000여 군중중 17,000여명의 좌익,남로당계열 군중이 미군정 통치반대등을 내세워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무시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하연데, 다수의 인원이 경찰서로 진입하려 하자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고 말았다.[9]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도 여러 명이 포함돼 있어서 민심을 자극시켰다.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1947년 3월 9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10](대부분의 파업 참여 경찰관은 파직되었고 그 결원 부분은 서북청년단으로 보충되었다). 3월 18일까지 선동 주범자들 약 150명이 검거되면서 파업이 일단락 되었고 각자 다시 집무에 복귀하였다.[11][12]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 보고서에서는 미군정은 제주도 주민 70%가 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인식했다. 박헌영의 비서 박갑동은 어느 정도 지지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13]